[철도와 게임] 레인 시뮬레이터 탄생비화: 무카이야 미노루 “음악가인 내가 철도게임을 만든 이유”
아래 글은 무카이야 미노루(向谷実)의 추억을 1인칭 시점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철도로 여행을 할 때는 기대에 부푼다.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조사할 때 시각표를 펼친다.
가지 않은 역 이름을 보면서 어떤 차창, 풍경일까라고 상상하게 된다.
이러한 드라마 같은 연출이 철도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중학교 3학년때 혼자 홋카이도에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는 표를 사는 것도 지금은 없는 재미가 있었다.
우선, 홋카이도행 표를 살 때 지금처럼 자동 표판매기에서는 못 산다. 그래서 창구에서 학생할인으로 사려고 하면
창구에서 “중학생이 혼자서 왜 그런곳을 가는거야?”라며 표를 잘 팔지 않는다. 가출소년으로 의심한 것이다.
“사실은 증기기관차 사진을 찍고 싶어서예요”라고 설명해야 했다.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는 현상이다.
또한 당시는 열차 지정석도 밤을 세우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이런걸 좋아했으며,
아직 미도리노마도구치(みどりの窓口)가 되기 전, 신주쿠역(新宿駅) 국철여행센터에서 표를 사기 위해
서쪽출구 광장에 하룻밤을 보낸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철도에서 사회라는 걸 배운거라 생각한다.
어느정도 지식이 없으면 여행을 하지 못했으니, 우선 지식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철도소년이었던 나였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걸 좋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에 카시오페아(CASIOPEA) 밴드에 가입했으며, 이후 나는 키보드를 계속 연주했다.
이것도 키보드라는 디지털 악기가 당시 최첨단이었다는 점이었다. 야마하(YAMAHA) 키보드에는
DX-7이라는 명기가 있는데, 이 키보드 개발에 내가 협력해서 스스로 소리를 만들기도 했다.
스스로 소리를 가공하기 위해 PC인 매킨토시를 1980년대부터 사용했다.
컴퓨터의 데이터를 보존하는 미디어도 계속 진화했다. 처음에는 플로피디스크(FDD)였던 것이 소형 하드디스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CD-ROM이 등장했다. 이는 당시로써는 획기적이었다.
당시 FDD에는 최대 1.44MB에 불과했으나, CD-ROM은 640MB로 용량이 440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이러한 진화로 소리뿐만 아니라 영상도 같이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는 이를 ‘멀티미디어(Multimedia)’라고 불렀다.
그리고 1993년에 ‘Touch the Music by CASIOPEA’라는 소프트웨어가 매킨토시 전용으로 탄생했다.
‘Touch the Music by CASIOPEA’는 비즈니스로는 실패했지만, 만드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 외에도
뭔가 재미있는 것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당연하게 되었지만, 영상데이터는 디지털화 함으로써 소리와 영상이 ‘동거’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영상을 빨리 재생하거나 늦게 재생하거나 가변(可變) 재생 후 다른 소리를 붙이는 건 쉽게 되었다.
어느날, 전철에 타고 있을 때, 이를 달리다 멈추는 형태로 표현하면 전철을 운전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들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번뜩 떠올랐다.
이때 철도를 좋아하는 나와 음악을 좋아하는 내가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틀림없이 팔릴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 자신감이 세계 최초의 철도운전게임 ‘Train Simulator’의 등장으로 연결되었다.
출처: 6월15일, AERA 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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