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SIOPEIA의 철도이야기 [JTInside] :: [트리비아] 오미야는 어떻게 ‘철도의 대거점’이 되었나?(1) [도호쿠선이 구마가야에서 분기되었다면] free counters

오미야역 중심 이야기는 201622 티스토리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http://jtinside.tistory.com/7643

 

200151, 사이타마현(埼玉県) 우라와시(浦和市), 오미야시(大宮市), 요노시(与野市) 합병하여

사이타마시(さいたま) 생겼다. 2003년에 사이타마시는 정령지정도시(政令指定都市) 되었다.

2 후에는 이와츠키시(岩槻市) 합병, 현재 사이타마시는 도쿄의 베드타운(Bed town)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사이타마시를 구성하는 지역까지 합쳤다고 말할 없다.

우라와는 예전 현청소재지였다. 사이타마시청 청사도 원래 우라와시청 청사였다.

한편, 오미야는 교통의 요충지를 무기로 사이타마시 경제발전을 선도하는 자부심이 있다.

사이타마시가 오미야시 지역은 오미야구, 서구, 북구, 미누마구(見沼) 4개로 분할되었다.

오미야는 오미야역(大宮) 그대로 오미야의 중심지다.

 

철도의 거리, 오미야 역사의 시작

오미야를 번영으로 이끈 오미야역은 1885년에 일본철도(日本鉄道) 역으로 개업했다.

일본철도는 도쿄부터 다카사키(高崎) 잇는 노선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현재 다카사키선(高崎線)이다.

건설하는 순서는 반대였으나, 일본철도에 다카사키선은 지선 취급, 본선은 도쿄와 도호쿠를 잇는

현재의 도호쿠선(東北本線)이었다.

 

 

일본철도는 다카사키선 구마가야역(熊谷)까지 개통한 도호쿠선 건설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 어디부터 도호쿠선과 다카사키선을 분기시킬지 결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우선 구마가야역부터 다카사키역 쪽으로 연장공사를 진행, 1884년에 구마가야~다카사키 구간을 개통했다.

그리고, 도호쿠선 착공이 다가오자 토치기현(栃木県) 아시카가(足利) 사업가들이 구마가야부터 선로를 분기시켜

아시카가로 잇는 노선 방안으로 철도당국 유치를 제의했다.

 

이러한 유치 움직임에 대해 철도책임자인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귀기울이지 않았다.

건설비, 공사기간과 개업 영업이익 등을 종합 계산한 이노우에는 오미야에서 선로를 분기하기로 결정했다.

여기부터 철도의 거리, 오미야의 역사가 시작했다.

 

실의 마을 변한 오미야역 주변

도호쿠선과 다카사키선 분기점으로 오미야역이 생기자 상황은 조금씩 변해갔다.

1897 이후 그동안 명주실(生糸) 생산이 활발했던 군마현(群馬県)보다도 개항지(開港地) 요코하마(横浜)

가까워져서 교통편리성이 높은 오미야역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01년에는 나가노현(長野県)에서 명주실 공장을 운영한 가타쿠라제사(片倉製糸) 사업확장을 위해

오미야로 공장을 옮겼다. 이후 명주실 공장이 연이어 이전하기 시작한다.

 

 

1904년에는 오미야관제사소(大宮館製糸所), 1907년에는 오미야마루야마제사소(大宮山丸製糸所),

1911년에는 와타나베구미오미야제사소(組大宮製糸所) 옮겨서 개업했다.

오미야역 주변은 실의 마을 되었다.

 

요코하마항까지 수송에 철도가 대활약

비슷한 구도는 제차업(製茶業)에도 적용했다. 메이지시대부터 전쟁시기까지 오미야에서도 많은 () 재배했다.

오미야에서 생산한 차는 요코하마에서 해외로 수출하게 된다. 요코하마항까지 수송에 철도가 대활약했다.

메이지시대 일본을 지원한 () 명주의 2대산업에 추가로 1894년에는 일본철도가 오미야공장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미야를 활성화시켜 인구증가로 이어졌다.

 

그러나, 시대와 함께 오미야는 도시구조 변화를 해야했다.

메이지시대 이후 도쿄는 대도시로 발전을 계속했으며 1932년과 1936년에는 주변 지역을 편입했다.

대도쿄시가 성립, 교외 택지화를 빠르게 했다. 그때까지는 농촌에 불과했던 시부야와 세타가야도 도시화를 진행,

주택시를 조성했다. 그리고 파급은 사이타마현 지역에도 영향을 받았다.

 

오미야에서는 경지정리조합을 조직, 주변 택지화를 빠르게 진행했다.

주택지 조성과 함께 1932년에는 아카바네(赤羽)~오미야를 전철화했다.

구간에서 전철화가 되는 케이힌토호쿠선(京浜東北線) 운행을 시작했다.

케이힌토호쿠선 가와구치(川口)~오미야 수송인원은 케이힌토호쿠선 운행을 시작한 1932년이 611만명이었다.

이것이 1937년은 1,1549,000명으로 두배 늘었다.

숫자에서도 도쿄 근교 택지화를 진행하여 도심으로 통근, 통학수요가 늘어난 있다.

 

 

 

메이지 이후 철도의 힘으로 도시화를 진행한 곳은 오미야 외에도 있다.

그러나, 철도의 힘으로 도시화를 많은 지역은 관영철도(営鉄道, 현재 JR)뿐만 아니라 사철이 들어갔다.

왜냐하면 관영철도와 사철이 힘을 합쳐 도시가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미야는 관영철도밖에 운행하지 않았다. 원래 오미야 정도의 인구규모, 산업이 있는 도시라면

사철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사철이 없는게 부자연스러웠다.

 

출처: 1122, 토요케이자이신문

 

2편에 이어집니다.

Posted by CASSIOPE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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