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SIOPEIA의 철도이야기 [JTInside] :: [트리비아] 오미야는 어떻게 ‘철도의 대거점’이 되었나?(2) free counters

1편에 이은 내용입니다.

 

땅값 상승과 공황으로 사라진 계획

오미야에 사철이 진출한 소부철도(総武鉄道, 현재 토부노다선[東武野田線]) 오미야역에 진출한 1929년이었다.

소부철도는 노다(野田) 생산품인 간장을 소비지역인 도쿄로 수송하는 목적으로 만들었다.

때문에 노다부터 카시와() 가는 경로를 우선하고, 도시화한 오미야까지는 뒷전이었다.

그래도 소부철도가 개업하자 다이쇼(大正) 말기부터 오미야에 형성한 분재마을(盆栽村) 특징이 되었고,

오미야의 분재산업은 활발해졌다. 지금도 세계적인 분재산지다.

 

사실은 오미야의 발전이 눈부실 무렵, 도쿄와 오미야를 잇는 사철 구상도 있었다.

치치부철도(秩父鉄道) 경영자인 모로이 츠네헤이(諸井恒平) 케이한전기철도(京阪電気鉄道) 경영자였던

오타 미츠히로(太田光凞) 발기인이 되어 1928년에 도쿄오미야전기철도(東京大宮電気鉄道) 설립했다.

도쿄오미야전기철도는 오미야역 서쪽출구를 기점, 요노혼마치(与野本町), 우라와(浦和), 와라비(),

이타바시(板橋) 거쳐 오츠카(大塚) 종점으로 계획했다.

거리는 26.5km 전구간 복선, 소요시간 30 이내로 노선이었다.

그러나, 도쿄오미야전기철도는 땅값 상승과 공황 요인으로 계획을 없앴다.

 

오미야를 독립한 경제도시로

제차, 제사(製糸) 농업기반으로 지역산업을 구축하고, 교통접근이 좋아서 도쿄 근교의 위성도시로도 발전했다.

패전 후부터 이러한 성장모델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오미야를 자립한 경제도시로 발전시키려는 생각이 지역에서 나왔다.

1955 통계에서는 오미야역 승차인원은 1,3627,000, 하차인원은 1,3624,000명이었다.

1967년에는 승차인원이 3,7323,000, 하차인원은 4,0364,000명으로 증가를 기록했다.

 

 

고도경제성장기에 오미야역 이용자가 늘어난건 오미야가 도쿄의 위성도시 성격을 강하게 한게 이유다.

물론 오미야역 출발/도착열차 수도 늘었다. 열차 운행편수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문제도 생겼다.

그동안 오미야역에는 자유통로가 없고 동쪽과 서쪽은 선로로 쪼개져있었다.

동서를 오가려면 지역주민들로부터 대형건널목으로 불리던 근처 건널목을 건너야 했다.

그러나, 열차 운행편수가 늘어나면서 대형건널목은 열리지 않는 건널목(かずの踏切)’ 되어버렸다.

지역발전에 제동이 걸리는 건널목 존재는 의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빨리 대책을 진행, 1959년에는 구름다리를 완성, 대건널목 문제는 풀었다.

 

오미야역에는 다음 문제점에도 부딪혔다. 도쿄까지 소요시간이 짧아졌고, 도쿄로 통근자가 늘어남에따라

시민이 도쿄로 쇼핑을 가게 되었다. 오미야의 소비가 도쿄로 유출되는 사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오미야시민이 도쿄에서 소비를 늘리면 당연히 오미야역 근처 상점은 매출이 떨어진다.

근처 상점의 매출이 떨어지면 도시 활기는 없어진다. 그러면 오미야의 쇠퇴로 이어진다.

 

수도. 도쿄를 상대로

수도인 도쿄를 상대하는 과제를 앞두고 지역 경제계는 대책으로 오미야역을 스테이션빌딩(Station Building)으로

정비하여 역을 쇼핑센터로 하는 구상을 만들었다.

오미야역은 1934년에 만들어 노후화 상태라는 것도 오미야 스테이션빌딩 계획을 밀어주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국철(国鉄) 도호쿠선과 케이힌토호쿠선 공사로 자금을 써서 재정 여유가 없는 이유로 망설였다.

 

국철의 사정을 알고 있는 오미야시와 경제계는 민간이 자금을 보태서 건물을 리뉴얼하는

민중역(民衆) 방식을 제안했다. 국철 합의도 하여 1967년에 오미야역빌딩(大宮ビル) 개업했다.

새로운 오미야역은 도쿄로의 구매력 유출을 막고, 고도경제성장기 이후 오미야 경제를 받치는 중심 존재가 되었다.

 

도호쿠신칸센, 죠에쓰신칸센 개업이 오미야 거점화에 불을 붙이다

그리고, 1982 도호쿠신칸센(東北新幹線), 죠에쓰신칸센(上越新幹線) 개업이 오미야 거점화를 촉진했다.

현재 도쿄역을 출발하는 도호쿠, 죠에쓰신칸센은 노선주변 자치단체의 반대 등으로 건설이 지연되어

오미야~모리오카(盛岡) 사이에서 장점개업으로 시작했다. 도호쿠. 죠에쓰신칸센에는 불운이었지만,

이것이 오미야역 존재감을 내외부로 알리는 방법이 되었다. 도호쿠. 죠에쓰신칸센이 도쿄역까지 연장한 후도

통근 신규노선으로 사이쿄선(埼京線) 사이타마신도시교통(埼玉新都市交通, 뉴셔틀) 개업했다.

철도가 오미야를 기틀로 만들었다. 후도 오미야의 도시화는 계속되었으며, 오미야역 앞에도 오피스빌딩이 늘었다.

 

예전 오미야를 지탱했던 제사장(製糸場) 도시화로 사라졌고, 공업도시에서 상업도시로 전환을 계획했다.

오미야역앞에 공장을 두었던 가타쿠라제사(片倉製糸) 1971년에 조업을 중단했다.

공장 철거지는 1983년에 오미야카타쿠라파크(大宮カタクラパ) 바뀌었다.

 

 

그리고 2004년에는 재개발로 대형 복합상업시설인 오미야코쿤시티(大宮コクンシティ) 거듭났다.

참고로 코쿤(COCOON) 영어로 고치(허물) 의미로 오미야가 제사사업으로 발전했다는 전하고 있다.

 

 

또한, 시대 흐름도 오미야의 거점성 강화에 기여했다. 버블경제시기, 도쿄 땅값은 치솟았다.

또한 도쿄로 극히 집중하는 폐해도 거론되며 수도 기능의 분산을 검토했다.

이때 수도 기능이전 논의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지만, 20113 동일본대지진을 계기로 수도 기능의

백업문제가 활발히 논의되었다.

오사카(大阪) 재해때 수도 기능확보를 담은 부수도(副首都) 구상을 내건다.

 

한편, 도쿄도는 근처 현과 요코하마시(横浜市), 가와사키시(川崎市), 사가미하라시(相模原市), 치바시(千葉市),

사이타마시(さいたま) 정령지정도시와 연계하여 9도현으로 수도 기능을 대체하는 방안을 모색한다.

사이타마신토심(さいたま新都心)에는 많은 중앙관청이 현지기관을 설치했다. 또한 대형 공공시설도 차례로 건설한다.

사이타마신토심 형성은 오미야역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있다.

 

 

2000년에 도호쿠선, 케이힌토호쿠선 사이타마신토심역이 개업했다.

수도 기능거점에서 가장 가까운역 자리는 양보했지만, 오미야역 존재감이 작아지진 않는다.

이는 신칸센 운행시각표에서도 있다. 2015 시각표개정에서는 모든 신칸센이 오미야역에 정차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키타칸토(関東) 도호쿠, 호쿠리쿠(北陸)에서 오미야로 접근은 크게 높아졌다.

이렇게 오미야역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도권의 북쪽 현관 입지를 굳혔다.

 

출처: 1122, 토요케이자이신문

Posted by CASSIOPE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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