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트리비아-400] 400명이 참가한 일본 최초의 철도파업은 도호쿠선이었다.
400회를 맞아 철도와 관련있는 ‘400’이라는 숫자를 찾아보니 차량은 신칸센 400계, 증기기관차 400형 등이 있었다.
최근 화제로 나고야철도(名古屋鉄道, 메이테츠)가 발표한 메이테츠나고야역(名鉄名古屋駅)의 새로운
역 빌딩 길이가 400미터라고 한다. ^^
다른 자료를 더 찾아보니, ‘일본 최초의 철도파업 참가자는 400명’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1898년2월24일부터 2월27일 사이 일어난 일본철도 기관사 쟁의(日本鉄道機関方争議)였다.
도호쿠선(東北本線) 우에노~아오모리(上野~青森) 사이에서 기관사 업무를 중단, 회사 측에 처우개선을 호소했다.
당시는 아직 ‘파업’이라는 말이 없고, 노동파면(労働罷免) 이라는 말을 썼다.
이 당시 일본은 경제가 빠르게 발전했다. 그러나 노동자, 특히 육체노동자의 처우는 변한게 없었다.
일은 늘어도 급여는 늘지 않고, 소년들까지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한편, 상점문화에서 서양식 기업문화로 바뀌는 과정에서 사무직 처우는 개선된다.
사무직과 현장직과의 차이가 벌어지고, 철도뿐만 아니라 공장노동자 등이 노동쟁의를 일으켰다.
당시 일본철도(日本鉄道, 회사이름)는 도호쿠 방면과 간토(関東) 일부에 철도망을 가진 국내 최대의 사철이었다.
메이지(明治) 정부는 철도를 모두 국영으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부직할 관영철도(官営鉄道)가
자금부족으로 철도를 건설할 수 없어서 민간출자 철도에 특혜를 주었다.
다만, 사철이라 해도 실제 건설은 관영철도가 하는 등 자본 외에는 관영철도 자체였다는 자료도 있다.
이후 일본철도는 국가에 매수되어 노선은 국철(国鉄), 그리고 JR동일본에 승계되었다.
당시 일본철도는 관영철도를 능가하는 규모여서 도호쿠 지방 간선인 도호쿠선을 멈추게 한 파업은 큰 사건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후쿠시마대학(福島大学) 쇼지 키치노스케(庄司吉之助) 경제학부 교수가 1968년에 쓴 논문
‘일본철도 기관사. 직공 동맹태업의 의의(日鉄機関方・職工同盟罷業の意義)’에 써 있다.
이 내용은 후쿠시마대학 사이트에 공개되어 있는데, 요점은 다음과 같다.
▶기관사의 요구는 처우개선, 직명개선, 임시급여 인상 세 가지였다
처우에 대해 당시 기관사는 일급 60전~1엔30전이었다. 그러나, 사무직은 월급 12~60엔이었다.
최저 급여와 비교하면 기관사 20일분으로 사무직과 같게 된다. 기관사는 중노동과 교대근무로
10~15일 정도 근무했을 것이다. 또 기관사는 일하지 않으면 급여가 없고, 사무직은 쉬어도 급여는 보증되었다.
기관사는 사무직과 같은 급여를 달라고 요구했다.
기관사들은 “실제로 기술을 익히고 철도를 움직이는 건 우리들이다. 그러나, 회사는 사무직보다
현장직을 하위로 보고 있다”라고 주장하고 직명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기관사가가 파업을 한 계기는 발신인이 불분명한 문서가 각 기관에 갔기 때문이었다.
요약하면 “위험하고 책임을 지는 업무에 대해 명예도 처우도 맞지 않았다. 모두 개선을 요구하자”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호응하여 기관사와 화부(증기기관차에 석탄을 넣은 역할), 견습 등은 비밀리에 동맹회를 결성했다.
각 기관구에서는 “열차가 늦어도 급행운행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안전규칙을 근거로 삼아 일부러
열차를 늦추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국철에서 실시한 준법투쟁과 같다. 파업보다 먼저 준법투쟁이 있었다.
사태를 파악한 회사는 주모자를 찾아 해고시켰다. 이 소식은 전보로 각 기관에 통보되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기관사를 단결시켰다. 1898년2월24일, 후쿠시마기관구(福島機関区)로부터
근로파면(파업)이 시작되고, 다음날 25일에 우에노~아오모리 모든 열차가 멈췄다.
회사와 동맹회 대표이 교섭 결과, 3월6일에 ‘급여는 협의로 결정’, ‘기관사 이름을 고칠 것’,
‘해고자 10명 중 주모자를 제외한 종업원을 신규채용할 것’을 합의했다.
근로파면으로 폐를 끼친 대중에 사죄하는 조건이 있었지만, 기관사 쪽 요구가 실현된 셈이다.
철도현장에 명예를 부여했으며, 동맹회는 4월5일에 일본철도교정회(日本鉄道矯正会)를 결성했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기업별 노동조합이었다.
세월이 지나 2002년. 아오모리현(青森県) 하치노헤역(八戸駅) 남서쪽 주차장 부지에 ‘일본노동조합운동
발상지 일본기관사 동맹파업 기념비(日本労働組合運動発祥之地 日本機関方同盟罷工記念碑)’가 세워졌다.
비석은 유니온(Union) 첫글자인 ‘U’모양이다. 전일본노동조합 발상 100주년 기념사업 문자도 있다.
이곳은 옛 시리우치기관구(旧尻内機関区)가 있었던 곳이다.
이때 일했던 이시다 로쿠지로(石田六次郎)가 동맹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사태수습을 위해 일단 해고를 받아들였지만, 이후 복직하여 일본철도가 국가에 매수된 후는
센다이철도국(仙台鉄道局) 고등관까지 승진했다. 이시다씨는 퇴임 후 고아원 이사장을 맡았다.
출처: 4월8일, MyN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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